함열남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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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세인물
南宮檍

한서(翰西) 남궁억은 구한말(舊韓末) 기울어가는 국운을 세워보려고 관계에서 정계에서 또한 언론계에서 정열을 바쳐 싸웠고 종교·교육 및 비밀결사를 통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한 애국지사이다.

1863년 12월 27일 한성 왜송골에서 출생하였으며 호(號)는 한서(翰西)로서 홀어머니 슬하에서 사숙한학(私塾漢學)을 수학하여 사서삼경을 통달하였다. 20세때 문중의 반대를 무릅쓰고 관립 영어학원에 입학하여 수석으로 졸업한 후 내부주사(內府主事)로 임관되어 고종황제의 어전통역(御前通譯)으로 활동하고 1887년 영국·독일·러시아 등 외국순방에 참여하였으며 1889년 궁내부 별군직(別軍職)에 임명되어 4년간 고종황제를 시봉하였다.

칠곡(漆谷)부사로 임명되었다가 1986년 서재필(徐載弼)을 중심으로한 독립협회 수석총무와 서법요원이 되어 독립문과 독립관을 세우고 한글 신문인 독립신문을 간행하였으나 조정에서는 독립협회에 대하여 대역부도 죄로 몰아 남궁억, 이상재, 방한덕 등 18명을 투옥하였다. 얼마 후 고종의 특별은사령(特別恩赦令)으로 석방되었으나 1898년 독립협회는 종말을 고하고, 동년 9월 5일 윤치호, 장지연, 이상재, 라수연 등과 손을 잡고 황성신문을 창간하여 일간신문으로 발행하였다.

南宮檍 無窮花詩碑

이 시비(詩碑)는 함열남궁씨(咸悅南宮氏) 한서(翰西) 남궁억(檍)의 무궁화시비이다.

남궁억은 시조 원청(元淸)의 30세손으로 중추도사 영(泳)과 배(配) 덕수이씨와의 12남매 중 외아들로 1863년(철종14)에 출생했다. 자(字)는 치만(致萬)이고 호는 한서(翰西)이다. 20세때 영어학교에 입학하여 22세에 고종황제의 통역관이 되어 다재다능(多才多能)한 능력이 인정되어 23세에 내부주사의 관직을 받아 칠곡부사·성주목사·양양군수를 역임하면서 선정을 베풀고, 내부토목국장때에는 정동 육조와 남대문사이 광화문길을 확장하고 파고다공원을 만드는 등 현대도시의 면모를 갖추게 하였다. 또한, 독립협회 총무직을 맡아 독립신문 발간·독립문 건립·황성신문 창간 무궁화의 국화지정에 힘썼다. 1933년 무궁화당 사건으로 투옥, 1939년 77세로 세상을 떠나니 일가들이 정성을 모아 무궁화노래를 새겨 독립기념관에 시비를 세웠다. 그 때가 1988년이며 자녀는 초대뉴욕총영사 염(炎)과 2녀를 두었다.

그의 업적을 보면 첫째, 황성신문사장·광동학회장 등 언론활동을 하였고 둘째, 무궁화를 국화로 제정하고 무궁화자수본 등으로 애국심을 고취하였으며 셋째, 양양현산학교와 홍천모곡학교를 창립하고 배화학당(현 배화여고)과 상동청년학교에서 교육사업을 하였다. 넷째, 서예의 대가(大家)로 궁체를 보급하고 다섯째,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3차례 투옥생활을 하였고 여섯째, 저서로는 동사략·조선이야기·가정교육 등 10여편과 무궁화노래·기러기노래·일하러가세 등 많은 노래를 지어 보급하였다.

구한말 5대 시인 휘 벽(壁)

公은 세보상(世譜上) 32世이며 대사성공(大司成公) 무편(戊編)에 속(屬)한다. 號는 초몽(草夢)이고 인천 강화(江華)에서 아버지 훈(薰)과 어머니 전주 이씨(全州 李氏)의 一男一女 中 외아들로 출생(出生)하였다. 1894年에서 1921年 까지 시인(詩人)으로서 짧은 삶을 살았다. 1912年 서울 한성고등보통학교(漢城高普)를 졸업(卒業)하고 오산중학교 교사(敎師)로 잠시 재직(在職)하였다.그 뒤 일본(日本)으로 건너가 동경음악협회(東京音樂協會) 간사(幹事)로도 있었으며,1920年에 창간(創刊)된 폐허(廢墟)의 동인으로 활동(活動)하였으며, 변 영로(卞 榮魯), 오 상순(吳 相淳), 염 상섭(廉 想涉) 等과 교분(交分)하던 구한말(舊韓末) 5大 시인(詩人)으로 꼽히는 천재(天材)이기도 하나 너무 짧은 생애(生涯)가 가슴아프다. 대한자강회월보(大韓自彊會月報) 1907年 1월號에 투고(投稿)하였던 애국설(愛國設)에서 당시(當時) 지도층(指導層)의 각성(覺醒)과 청소년교육(靑小年敎育)의 중요성(重要性)을 촉구(觸具)하기도 하였다. 작품 활동(作品 活動)은 主로 "청춘"과 "폐허" 및 "조선일보" 일본잡지인 "태양"을 중심(中心)으로 전개(展介) 되었는데, 일어(日語) 및 영어(英語)로 된 시(詩)와 수필(隨筆)도 있다. 1918年 "청춘"에 "孤獨은 너의 運命이다" 等 5篇의 일문시(日文詩)와 "나의 세상" "나의 사랑" 等 2篇의 영문시(英文詩)가, "폐허(閉墟)"에는 수상(隨想) "자연(自然)"(1920), "풀"(1921), "생명의 비의(生命의 秘義)"(1921) 등 4篇의 詩, 조선일보(朝鮮日報)에는 "신비의 인연(神秘의 因緣)", "출생(出生)" 等 7篇의 詩가, 1922年 "신생활"에는 "별의 아픔", "마(馬)" 等 5篇의 유고시 및 일기(日記)가 실려있다. 27歲로 요절하였기 때문에 작품 수(作品 數)가 극히 한정(限定)되어 있으나, 얼마 남기지 못한 유작(遺作)들은 한국근대(韓國近代) 시사(詩史)에서 특이(特而)한 시세계(詩世界)를 보이고 있다. 卽, 유년기(幼年期)의 민족주의적(民族主義的) 관념(觀念)과 초기시(初期詩)에서 보이는 미(美)와 우주적(宇宙的) 조화(調和)를 포함한 다양성(多樣性), 그리고 "폐허"지로 부터 본격화(本格化)한 시작(詩作)들이 지니는 사상(思想)이 시적(詩的) 특색(特色)이 되고 있다.

그의 문학(文學)은 당시(當時) 우리 문단(文壇)에 만연(蔓延)되고 있었던 병인적(病因的) 퇴폐성(退閉性)이나 감상(感想)에 물들지 않고, 그 나름대로 자연(自然)의 순실미(純實美)와 ‘생명의 비의’와 대지사상 等을 추구(追求)한 것 等을 특색(特色)으로 들 수 있다.

단학자 휘 두(斗)

公은 세보상(世譜上) 18世이시며 고려벽상공신(高麗壁上功臣)으로 문하시중(門下侍中) 을 역임(歷任)하신 諱 신(信)公의 9代孫이시고 간성공(杆城公)의 5대손(五代孫)이시다. 中宗 十一年(1526年)에 전라도 임피현(臨陂縣)에서 아버지 諱 집(緝)公의 長男으로 비 교적(比較的) 부유(富裕)한 가정(家庭)에서 태어나 1555年 사마시(司馬試)에 급제(給第)하여 진사(進士)가 되tl고 그의 비범(非凡)한 재주와 문장(文章)이 성균관(成均館)에 까지 명성 (名聲)을 떨쳤으며 사람들이 그의 詩를 즐겨 외웠다.
公은 서울로 집을 옮기고 시골에는 첩(妾) 한 사람을 두어 매년(每年) 추수(秋收)를 하여 올려가곤 하였는데 妾은 절세미모(絶世美貌)에다 재주까지 비범(非凡)하여 그림과 글씨에 무불능통(無不能通)하니 公께서 지극(至極)히 총애(寵愛)하셨다. 그러나 妾이 이성(異姓)의 조 카와 간통(姦通)하는 것을 목격(目擊)하고 두 사람을 활로 쏘아 죽인 後 금대산(金臺山)에 들어가 머리를 깍고 중이 되었다. 그리고 다시 지리산(智異山)의 쌍계사(雙溪寺)에 머물다가 태백산(太白山)으로 들어가 의령야암(宜寧野菴)이라는 암자(庵子)에 머물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한 젊은 스님으로부터 도교(道敎)의 방술(方術)이 뛰어난 노승(老僧)이 무주(茂州) 치상산(稚裳山)의 어느 암자(庵子)에 기거(起居) 한다는 소식(所息)을 접(接)하시고 무주(茂州)에 있는 치상산(稚裳山)으로 찾아가서 그 노승(老僧)을 만나 신선술(神仙術) 수련(修練)에 입문(入門)하게 되었다. 수련과정(修練過程)은 정신통일(精神統一)을 위하여 잠 안자는 法과 곡기(穀氣)를 끊는 法을 익히고 이를 응용(應用)하여 내단수련(內丹修練)의 극치(極致)인 신태(神胎) 일보직전(一步直前)까지 도달(到達)하였다고 한다.

한 때는 오성(鰲城) 이 항복(李 恒福)이 젊었을 때 80이 넘은 公을 만나 감탄(感歎)하며 “선생(先生)께서는 90이 다 되셨는데도 정력(精力)이 젊은 사람 같으니 어떤 비방(秘方)을 쓰십니까”라고 질문(質問) 하였다고 류 광익(柳 光翼)의 저서(著書)인 사암집화(私岩輯話)에 소개(紹介)되기도 한다.
이 수광(李 수光)은 그의 저서(著書)인 지봉유설(芝峰類說)에서 소개(紹介)하기를 "언제나 명산 대천(名山 大川)을 떠 돌아다녀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가히 지선(地仙 : 땅위에 사는 神仙)이라 부른다"고 하였다. 그는 뛰어난 단학자(丹學者)로서 신선술(神仙術)의 대가(大家)이다. 또한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 위험(危險)에 처하여 피신(避身)한 젊은 충무공(忠武公) 이 순신(李 舜臣)을 만나 자식같이 돌보며 심신(心身)의 연마(硏摩)와 무예(武藝)를 가르쳐 후일(後日) 구국(求國)의 명장(名將)으로 왜적(倭敵)으로부터 조선(朝鮮)의 바다를 지켜 나라를 求하게 한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다.

조선 중기(朝鮮 中期) 선조(宣祖)와 광해군(光海君) 때의 허 균(許 均)이 지은 "남궁 두 선생전"은 "홍길동전"과 함께 쌍벽(雙壁)을 이루는 소설(小說)이다. 슬하(膝下)에 외아들 인(引)을 두었으나 불행(不幸)하게도 그 後에 기록(記錄)이 없어 아쉬움을 금(禁)치 못한다.

주:
  • 참고문헌(參考文獻)으로는 허 균(許 均)이 지은 남궁선생전(南宮先生傳)과 신선단학(神仙丹學), 류 광익(柳 光翼)이 지은 사암집(私岩輯)과 류 몽인(柳 夢寅)이 지은 야담선도부(野談仙道部)가 있다.
해운과 조선의 대부 련(鍊)
남궁이 해냈어!

6.25 전쟁(戰爭) 中이던 1952年 10月 21日 대한민국(大韓民國)의 임시(臨時) 수도(首都) 부산(釜山)에서는 감격적(感激的)인 사건(事件)이 벌어졌다.
1만 680톤 중량(重量)의 한국(韓國) 국적(國籍) 화물선(貨物船) 미스코리아號가 미국 서해안(美國 西海岸)의 포틀랜드港을 向하여 부산항(釜山港) 제 1 부두를 출항(出航)하는 일이다.
출항식(出航式)에 참석(參席)한 리 승만(李 承晩) 대통령(大統領)은 테이프를 끊기 전에 선내(船內)를 둘러보면서 박 옥규 선장(後에 海軍參模總長 歷任) 이하(以下) 항해사(航海士)와 기관사(機關士)들에게 흥분(興奮)된 어조(語調)로 “자네들, 이 배를 몰고 정말 미국(美國)에 갔다 올 수 있나?” 라고 물었다. “각하(閣下), 염려(念慮)하지 마십시오. 자신(自信) 있습니다.” 선장(船長)은 힘차게 대답했다. 李 大統領은 매우 흐뭇한 표정(表情)으로 일일이 선원(船員)들의 등을 두들겨 주며 격려(激勵)하였다.

李 大統領으로서는 일만톤급 한국(韓國) 국적(國籍)의 화물선(貨物船)이 가득히 고철(古鐵)을 싣고 대미(對美) 항로(航路)에 취항(就航)하는 것이 여간(如干) 대견스럽지 않았다. 대통령(大統領)은 큰 목소리로 “南宮이가 해냈어! 기어이 해냈어!” 라고 감격(感激)에 벅찬 말을 연발(連發)하였다. 大統領의 얼굴은 상기(上氣)되었고 더욱 흥분(興奮)되었다. 이 날의 주인공(主人公) 미스코리아 號의 선주(船主)는 극동해운㈜의 사장(社長), 38歲, 신장 180㎝의 당당한 체구(體驅)의 미남청년(美男靑年) 일본대 경제학부(經濟學部)를 졸업한 남궁 련(南宮 鍊)이었다. 당시(當時)에는 1만톤급 대형 화물선(大形 化物船)의 보유(保有) 국가(國家)가 다섯 나라도 안되었으며 일본(日本)도 갖지 못한 상태(狀態)였다.

1946年에 극동기업㈜을 출발(出發)로 사업(事業)을 시작(始作)하고 1949年에 극동해운㈜을 설립(設立)하여 3年 後에 이런 위대(偉大)한 일을 해내었으니 참으로 어른의 안목과 능력은 경이로운 바 있다. 그 후 리 대통령의 요청에 따라 우리 나라 해운의 종가격인 대한해운공사의 사장(社長)으로 한국(韓國) 해운(海運)의 개척자(開拓者)의 자리에 당당히 임하게 되었다. 1958년 한국석유㈜를 설립(設立) 정부(政府)의 요청(要請)으로 울산에다 석유화학단지(石油化學團地) 건설(建設)을 위한 마스터플랜을 수립(樹立)하고 대규모(大規模) 정유공장(精油工場)을 건설(建設)하기 위한 교섭차(交涉此) 도미(渡美)하였는데 4.19가 일어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좌절(挫折)의 큰 아픔을 안게 되었다.

5.16 이후에는 한국경제인협회(全經聯의 前身) 부회장(副會長)으로 군사 정부(軍事 政府)의 경제개발정책(經濟開發政策)에 적극(積極) 참여(參與)하고 한국종합제철㈜ 이사, 경제심의회 의원, 금융통화위원으로 활약(活躍)하면서 울산을 공업기지(工業基地)로 선정(選定)하는 많은 아이디어를 창출(創出)하여 제공(提供)하였다. 1968년에는 박대통령의 요청(要請)으로 노사 분규(勞使 紛糾)와 적자경영(赤子經營)으로 파산(破産) 직전(直前)인 대한조선공사를 인수(引受)하여 20년간 사장, 회장을 역임(歷任)하였으며 1973년에 온 재산(財産)을 투입(投入)하여 옥포에 조선소(造船所)를 건설(建設)하여 박대통령 임석하(臨席下)에 발주식(發注式)을 거행(擧行)하기도 하였다.

참으로 세계적 규모(世界的 規模)의 시각(視覺)을 가진 기업인(企業人)이었으며 한국(韓國)의 기적(奇蹟)은 곧 우리 해운(海運)과 조선(造船)에 의해 선도(先導)되었다 해도 결코 과언(過言)이 아니다. 바다와 함께 배와 함께 오로지 나라의 경제 재건(經濟 再建)을 위해 한 평생(平生)을 다 바치신 거인(巨人)이요, 자랑스러운 남궁(南宮)의 후손(後孫)이다.

그냥 좋아서

특기(特記)해야 할 일은 취미(趣味)로 즐겨 하셨던 컬렉션 이야기다. 고미술(古美術)에 관심(關心)을 가지시고 그냥 좋아서 모은 것이라는데 소장(所藏)한 것이 무려 3,000점이나 된다는 사실(事實)이다. 그 중에는 불상(佛象), 금관(金冠), 금채도기(金彩陶器) 등 진귀(眞貴)한 것들이 많고 국보(國寶)로 지정(指정)된 것, 국보급(國寶級), 보물급(寶物級)에 비견(比肩)할 만한 것이 상당수(相當數)이다. 또 고려(高麗)와 조선시대(朝鮮時代) 유물(遺物)이 800여점, 수백점의 탈 등 재미있는 물건(物件)과 대단한 物件들이 고루 있어 한국미술사(韓國美術史)를 바꾸어 놓을 만큼 귀중(貴重)한 것들이라는 중평(重評)이다.

代를 이은 종사(宗事)에 헌신(獻身)

27世 諱 복의 3男 1女 중 3男으로 1915年에 양주(陽州) 루원(樓院 : 現 방학동)에서 출생(出生)하였으며 호(號)는 강석(江石)이시고 항렬(行列)은 28世 윗 금(金)이다. 때때로 어려운 일이 있을 때면 소리 없이 보이지 않게 종사(宗事)를 도우셨다.

노중련 휘 흔(炘)

公께서는 선조(宣祖) 38年(1605年)에 아버지 諱 부와 어머니 경주 김씨(慶州 金氏)의 4男 1女 中 4男으로 출생(出生)하시었고, 중부(仲父)이시며 통정대부 음사(通政大夫 蔭仕),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돈녕부 직장(敦寧府 直長), 무주현감(茂州縣監)을 지내신 諱 격(格)公에게 입양(入養)되어 교리공(校理公) 병편(丙編) 21世로 代를 이으셨다. 字는 회이(晦而)이시고 관직(官職)은 통사랑(通仕郞)에 올랐으며 덕행(德行)과 학문(學文)이 뛰어나 칭송(稱頌)을 받았으나 병자호란(丙子胡亂)으로 인(因)하여 인조(仁祖) 임금이 삼전도(三田度 : 지금의 송파)에서 청태종(淸太宗)에게 무릎 꿇고 항복(降伏)하는 것을 보고 비분애통(비분애통)하시고 한비(汗碑 :오랑캐의 碑石)가 세워지니 그 땅을 더럽게 여겨 105결(結: 30萬坪)의 토지(土地)의 재산권(財産權=文書)을 불사르고 다시는 자기 소유(所有)로 삼지 않았으며 생각하지도 않고 의연(毅然)히 강원도 홍천 모곡으로 은거(隱居)하여 한 生을 마감하시니 세인(世人)들은 그를 칭송(稱頌)하여 노중련(魯仲連 :魯나라의 學者)과 같은 군자(君子)라고 하였다. 배위(配位)는 현풍 곽씨(玄豊 郭氏)와 장수 황씨(長水 黃氏)사이에서 3男 5女를 두시니 長男은 장연부사(長淵府사) 諱 후, 次男은 諱 무, 3男은 諱 서 이며 5女는 이 지학(李 志學), 신 준(申 準), 강 여위(康 汝衛), 윤 익준(尹 益雋), 윤 흥일(尹 興一)이다. 효종(孝宗) 7년(1656年)에 향년(享年) 52歲로 타계(他界)하셨다. 墓는 강원도 홍천군 서면 동막골 선영하(先塋下) 亥坐에 모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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