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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를 정하다

남궁씨(南宮氏)의 유래(由來)는 중국(中國)의 고대(古代)에서 비롯된다. 본래(本來) 황족(皇族)인 희성(姬姓)이었다. 은(殷)나라에 이르러 南쪽 宮인 남궁에 살았다하여 남궁(南宮)으로 성(姓)씨를 定하였다고 한다.

원조 휘 수(脩)

公께서는 중국(中國) 남궁(南宮)씨 孫의 한 분으로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은(殷)나라를 이어 주(周)나라를 건국(建國)하니 은(殷)나라 주왕(주왕)의 숙부(叔父)가 되는 기자(箕子)가 동래(東來)할 때 이 유성, 황보 검등과 남궁 수(南宮 修)공께서도 동행(同行)하여 평양(平壤)을 중심(中心)으로 단군 조선(檀君 朝鮮)을 이어 기자 조선(箕子 朝鮮)을 건국(建國)하고 公은 사도(司徒)의 職에 올라 백성(百姓)들에게 시서(詩書)와 예악(禮樂)을 가르치고 음식의 예법(禮法)과 제사(祭祀)에는 편두(제기-祭器)를 쓰게하며 의관제도(衣冠制度)와 직제(職制)를 중국과 같게 하였다고 하나 자세한 기록(記錄)은 아직까지 발견(發見)하지 못하였고 또한 그의 후손(後孫)들에 대한 기록도 찾을 길이 없어 고려조(高麗朝) 광종(光宗)때 시조(始祖) 諱 원청(元淸) 전 까지는 알길이 없다. 후손(後孫)들은 公을 원조(遠祖)로 모시어 추앙(推仰)하고 있다.

남궁 자(南宮 子) 휘 괄(适)

남궁(南宮)씨를 처음 사용(使用)한 분은 휘 괄(适=括)공으로 추정(推定)되며 이 어른이 곧 남궁 자(子)이시다. 公은 주문왕(周文王)의 사우(四友=네 친구)중 한 분으로 대장군(大將軍)으로 있을 때 폭군(暴君)인 殷나라 주왕(紂王-BC1154 ~ 1111)에 의해서 투옥(投獄)되어 죽게 된 문왕(文王)을 기지(機智)를 발휘(發揮)하여 구해 내기도 하였고 무왕(武王)을 도와 은 나라를 멸망(멸망)시키고 주(周)를 건국(建國)한 공신(功臣)으로 이상서(二尙書)에 오르고 한 지방(地方)을 식읍으로 받아 다스리게 되었으며 그 곳의 지명(地名)을 公의 姓을 따라 남궁현(縣)이라 하였다고 傳한다. 公은 많은 치적(治績)을 남긴 공신(攻臣)으로 팔학사(八學士)중의 으뜸이며 십난신(정치를 잘 하는 사람) 중의 한 분으로 존경(尊敬)을 받았다.

중국(中國)에서는 남궁씨를 고귀(高貴)한 성(姓)이라고 부른다. 일설(一說)로는 諱 괄(括)公의 아버지가 서한 고조시기(고조시기)에 이 고을을 다스리는 제후(諸候)였으며 諱 括 公은 이 곳에서 출생(出生)하였다라고 한다. 괄(괄) 公은 춘추시대(春秋時代) 공자(孔子)의 사위가 된 諱 괄(括) 公과는 동명이인(同名異人)이다.

앞으로 우리의 주어진 과제(課題)는 동래(東來)하여 우리의 원조(遠祖)가 되신 諱 수(脩)공과의 관계(關係)를 밝히는 것이 중요(重要)하다. 두 분은 같은 시대(時代)에 사셨으므로 더욱 흥미(興味) 있는 일이다.

주:
  • ① 中國의 남궁시(市)에는 괄 공의 유적(遺跡)으로 큰 사당(祀堂)이 있고 墓는 고층이 되어있다.
  • ② 주문왕의 四友 : 태진, 산의생, 횡요, 남궁 괄
  • ③ 십난신 : 주공, 소공, 태공망(강태공), 필공, 태진, 횡요, 산의생, 남궁 괄, 무왕의 모 태사
  • ④ 희성 : 처음 삼황인 황제(黃帝)로부터 5제의 소호(少昊) → 주문왕(昌) → 주무왕(發)과 그 아우 주공(旦)으로 이어지는 황족
  • ⑤ 남궁시(市) : 오랜 역사(歷사)를 가진 도시로 1986年 남궁시로 승격(昇格)되었고 현재(現在) 인구(人口)는 46萬. 남궁씨와 관련(關聯)된 사적(史跡)이 많이 있다.
관향(본관)을 정하다

고려(高麗) 성종(成宗) 10年(991年)에 諱 원청(元淸) 어른께서 31歲가 되시던해에 대장군(大將軍)이 되시어 여진족(女眞族)을 백두산(白頭山) 북방까지 몰아내는 등 많은 전공(戰功)을 세워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로 감물아현백(現 익산시 함라면)에 봉작(封爵)되고 이 일경을 사패지(賜牌地 :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사람에게 왕이 내려 주는 땅)로 받으시어 이곳에 정착(定着)하게 되므로 비로소 관향(本貫)을 함열(咸悅)이라 하였다.

관향 함열의 역사

남궁(南宮)씨의 관향(貫鄕)인 함열(咸悅)은 그 역사(歷史)를 살펴보면 전북 익산시에 屬해 있는 지명(地名)으로 백제 시대(百濟 時代)에는 감물아현(甘勿阿縣)이라 불리우다가 삼국통일후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때 함열(咸悅)로 고쳐서 임피군(옥구군 임피면)에 속하게 하였으며, 조선(朝鮮) 太宗9年(1409年)에 용안(龍安)과 合하여 안열현(安悅縣)으로 고쳤고, 7年 뒤에 다시 함열현(咸悅縣) 복구되어, 조선조 500여년 동안 현청(縣廳) 소재지로 관아가 있었으며 1913年 익산군(益山郡)에 합병(合倂)되어 함열면(咸悅面)이 되었다. 그 後 1979年에 함열읍(咸悅邑)으로 승격(昇格) 되었고 다시 1995年에 도.농통합(都.農統合)에 의해서 전북 익산시 함열읍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남궁씨의 총인구

2000年 경제기획원(經濟企劃院)이 실시(實施)한 인구조사(人口調査) 결과(結果)에 의하면 함열 남궁씨(咸悅南宮氏)는 남한(南韓)에 총 5,666 가구, 18,703 명으로 남한의 인구 순위가 93位인 것으로 조사(調査)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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