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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 선조 효자로 인해 생긴 지명 "쌍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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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출판 산하 (김근태 저) 서울600년 이야기 <198page ~ 204page>


35. 효자로 인해 생긴 이름, 쌍문동

쌍문동은 한자로 둘을 뜻하는 ‘쌍(雙)’자와 문 ‘문(門)’자를 써서 두 개의 문이 있는 동네라고 해서 붙여진 마을 이름이란다. 여기에서 말하는 두 개의 문은 보통 집의 대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정려문(旌閭門)이라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야. 그럼 또 정려문이란 무엇이냐 하면 충신·효자·열녀 등을 표창하고자 그 사람들 집의 문 앞에 세우던 붉은 색의 문을 말해.
정작 중요한 것은 이 마을에 있던 두 개의 정려문이 과연 누구의 것이냐 하는 것이 문제야. 지금까지 이 마을에 있었던 두 개의 정려문은 이 마을에 살던 계성이란 사람의 아들이 지극한 효자였기 때문에 그를 표창하기 위해서 정려문을 두 개나 세웠다고 알려져 있었어.
그런데 이 이야기가 기록에 없이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면서 앞뒤가 잘 맞지 않게 된 것 같다는 것이 선생님의 생각이야. 가장 중요한 주인공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는다는 것도 미심쩍고, 한 사람의 사건에 두 개의 정려문을 세웠다는 것도 믿기가 어려운 거지.
그래서 오늘은 쌍문동의 유래에 대해 새로운 말씀을 해 주실 분을 찾아 온 것이야. 자 저기가 약속 장소인데 들어가 볼까?
안녕하세요? 쌍문동의 유래에 대해 조사하기 위해 온 김근태입니다. 학생들과 우리 설화를 찾아 여행하고 있는데요. 함께 온 친구는 중학생이 수현이와 재원이, 저기 초등학생으로 서연이 승현이입니다. 선생님께 인사 드리세요.
반갑습니다. 저는 남궁일주라고 합니다. 성이 두 글자인 복성(複姓)이라 처음 듣는 분은 저를 남씨로 착각하기도 합니다. 제가 인터넷에 쌍문동의 유래에 오류가 있다고 썼던 글을 김교수님이 보시고 연락을 하셔서 이렇게 만나게 되었습니다.
저의 조상님 중에 남궁(南宮) 지(墀)라는 어른이 계셨습니다. 이 어른이 효성으로 유명했던 분이셨어요. 제가 그분의 이야기를 조사해 보니 바로 쌍문동의 유래와 관련이 있는 이야기였습니다. 자 들어 보세요.
도봉구는 옛날에 경기도 양주군 해등촌면 무수울로 불렸던 곳입니다. ‘무수’라는 말은 예부터 사용하던 우리말인데, 한자로 쓰면서 여러 가지로 다르게 적어 왔습니다. 한때는 물 ‘수(水)’와 쇠 ‘철(鐵)’ 자로 써서 뜻을 전달하려고도 했었습니다, 지금은 한자로 없을 ‘무(無)’, 걱정 ‘수(愁)’로 써서 한자의 발음을 살리고 걱정 없는 살기 좋은 마을이라는 뜻으로 풀이합니다. 또 이와는 달리 이곳에 있는 영춘군 이인(李仁, 1465∼1507, 세종대왕의 손자·)의 묘터가 신선이 소매를 펼치고 춤추는 모양과 같다고 해서 춤출 ‘무(舞)’, 소매 ‘수(袖)’로 쓰기도 했던 곳입니다.
바로 이 무수울에 통훈대부 벼슬의 남궁 도(燾)라는 분이 사셨습니다. 임금님의 명령을 전달하거나 호위를 맡는 선전관청에서 근무를 하셨습니다. 그분의 아들이 바로 남궁 지라는 분인데 어릴 때부터 효성으로 이름이 나 있었습니다.
어느날 부친이 갑자기 병환이 들게 되었습니다. 거동을 할 수 없게 되어 관청에도 나가지 못하자 남궁 지는 몰래 자기 손가락을 끊어 자라의 피라고 하고 약으로 드릴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부친의 병세가 아무런 변화가 없자 이번에는 부친의 대변을 맛보고 병세를 파악하기도 했습니다. 약을 드릴 때마다 대변에도 변화가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운명은 하늘에 달린 것입니다. 아무리 효성스런 아들도 부친의 죽음을 늦출 수는 있어도 아주 막을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슬픔을 추스르기도 전에 그의 모친마저 병석에 눕고 말았습니다. 남궁 지는 하늘을 우러러 자신의 불효로 인해 부모님의 병환이 심해졌다고 울부짖었습니다.
하루는 병환이 드신 모친이 꿩고기를 먹고 싶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효자는 한 겨울에 산에 가서 꿩을 잡으려다가 잡지 못하고는 자신의 불효됨을 한탄하고 울며 집에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어디선가 한 마리의 꿩이 나타나 길옆에 엎드려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결국 효심에 감동하여 하늘이 내려주신 꿩으로 어머니의 병세는 많은 효과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덧 어머니마저 세상을 등지게 되어, 이번에도 남궁 지는 어머니 무덤 옆에 움막을 짓고 3년을 하루같이 슬퍼하며 지켰습니다.
한편 남궁 지의 부인인 하동정씨 역시 어려서부터 착실하고 효성으로 이름이 있던 분이었습니다. 부인이 처음 혼인하여 시집을 오는데 친정에서 보내준 장롱과 경대를 다시 돌려 보내기도 했습니다.
“나는 이미 출가외인이 되었으니 어찌 친정의 물건을 탐내어 부모를 공양하는데 어려움을 겪게 하겠습니까?”
이렇게 말씀하면서 검소하게 생활하셨습니다. 시집에 와서도 효도와 우애를 갖추어 지극히 정성을 다하셨습니다. 시아버님께서 병석에 누워 2년간이나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할 때에 마침 정부인은 아기를 낳았습니다. 정부인은 갓난아기를 남에게 맡기고 항시 시아버님을 모시며 아기에게 먹일 젖을 시아버님께 대신 드렸습니다.
남궁 지의 효성과 정부인의 행실은 곧 마을을 넘어 양주 땅 전체로 퍼졌고 조정에 알려져 나라로부터 조봉대부동몽교관이란 벼슬과 함께 정려문이 내려졌던 것입니다.
두 개의 정려문 가운데 첫 번째 정려문은 이렇게 남궁 지 선생 부부의 효심으로 인해 세워진 것인데, 또 하나의 정려문 이야기가 있습니다. 남궁 지의 여섯째 아들로 남궁 조(鋽)라는 분이 이 마을에 사셨습니다. 부친인 남궁 지의 효행을 어려서부터 본받아 그분 역시 효성이 지극하였습니다. 모친의 병환이 위독해졌을 때에는 옷차림을 한 번도 풀지 않고 정성껏 약을 달여 드렸다고 전합니다.
민간에서 생명을 맡아 신앙되고 있는 북두칠성에게 그는 자신이 모친 대신 죽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빌었다고 합니다. 부친이 했던 것처럼 자신도 손가락을 끊어 어머니께 약으로 드렸습니다. 그런데도 모친이 세상을 떠나자 그는 묘 옆에서 3년 동안 정성을 다해 묘를 돌보며 살았습니다. 그의 효성이 조정에 알려져 정려문을 하사받고 조봉대부동몽교관의 벼슬을 받았습니다.
함열 남궁씨 종친회에서 보관하고 있는 당시 임금님이 내린 교지(敎旨)에 보면, “광서(光緖) 19년 계사(癸巳) 12월 16일”에 두 개의 정려문이 함께 내린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서기로는 1893년인데 남궁 지 선생과 남궁 조 선생의 벼슬도 이때 증직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증직이란 죽은 다음에 내리는 벼슬인데, 남궁 조 선생까지 돌아가신 다음에 받으신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마을에 두 개의 정려문이 생기자 자연스럽게 쌍문동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된 것입니다. 자, 이제 이 마을의 분명한 유래에 대해 알게 되셨습니까?
아, 잠깐만! 중요한 사실을 빠트릴 뻔했습니다. 남궁 지와 그 아내 정씨 묘는 서울 도봉구 쌍문동 남쪽에 있었고, 아들인 남궁 조의 묘는 쌍문동 이패(二牌)라는 곳에 있었는데 1967년 봄에 경기도 양주시 은현면 용암리 도락산으로 함께 옮겼습니다. 이곳에 가면 예전에 도봉동의 무수울과 방학동의 성고개(城峙)에 있었던 두 개의 정려문을 복원해서 보관하고 있는 것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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